사람들은 언제
가장 많이 다치고 숨졌을까요?
민간인, 국방경비대·국군, 남로당 무장대를 나누고 큰 사건을 날짜순으로 놓았습니다. 숫자가 갑자기 커지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께 봅니다.
같아 보이는 숫자도
뜻이 다릅니다
- 15,218명
2026년 현재 평화공원 안내가 보여주는 전체 확인 희생자 수입니다.
- 14,442명
아래 ‘시기별 흐름’을 만든 2019년 보고서의 당시 집계입니다.
- 부상자
민간인 전체 부상자 합계는 없습니다. 사건별 부상 기록과 후유장애 결정 164명만 따로 봅니다.
- 무장대
당원 전체가 아니라 무기를 들고 싸운 남로당 무장대를 뜻합니다. 전투별 보고만 남아 있습니다.
피해는 어느 때
가장 크게 늘었을까요?
1948년 10월 11일부터 약 다섯 달에 2019년 집계 희생자의 67.2%가 몰렸습니다. 막대가 길수록 그 시기에 확인된 희생자가 많습니다.
초토화작전과 집단희생이 이어진
1948.10.11~1949.3.1
날짜를 알 수 없는 희생자 310명은 막대에서 뺐습니다. 이 수는 사망자만이 아니라 사망·행방불명·수형·후유장애 결정을 합친 것입니다. 근거: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89쪽, 표 2-29
국방경비대·국군 사망도
1948년 말에 크게 늘었습니다
보고서는 47명의 사망일이 1949년 4월 10일로 한꺼번에 잘못 적혔을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아래 숫자는 보고서 본문이 날짜를 바로잡아 다시 나눈 값입니다.
- 사망2명부상1명
- 사망11명부상0명
- 사망100명부상0명
- 사망29명부상0명
- 사망16명부상1명
누가 다치고
숨졌는지 골라보세요
한 사건 안에서도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릅니다. 아래 단추를 누르면 선택한 사람들의 기록만 남습니다.
위원회 전체 희생자 표에는 군인·경찰·우익단체 결정자도 일부 들어 있어, 이를 모두 민간인 사망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토벌대 99명·무장대 57명·그 밖의 원인 8명입니다. 사건 약 50년 뒤 신고가 시작돼 실제 전체 부상자보다 적습니다.
추가조사에서 확인한 전체 전사자입니다. 경찰 사망자는 섞지 않았습니다.
국가유공자 자료로 확인한 전체 전상자입니다. 사건별 기록에는 더 많은 부상 숫자가 남기도 합니다.
전투 뒤 작성된 미군·군경 보고 숫자를 사건마다 ‘보고’라고 표시했습니다.
다친 대원을 산으로 옮겨 정확히 세기 어려웠다는 증언이 있어, 빈칸을 0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조사에서 확인 당시 보고 숫자 전체 수 없음
- 01
관덕정 앞 경찰 발포
3·1절 기념행사가 끝난 뒤 경찰이 군중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주민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습니다. 이 일 뒤 파업과 검거가 이어지며 갈등이 더 커졌습니다. 다만 이 사건 하나만으로 4·3 전체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민간인 숨짐
- 6명 조사에서 확인
- 민간인 다침
- 8명 조사에서 확인
- 02
12개 경찰지서 동시공격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약 350명이 같은 새벽에 경찰지서와 지목한 사람들의 집을 공격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처음 공격 당일에 주민과 경찰, 무장대에서 피해가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무장공격과 진압이 여러 해 이어졌습니다.
- 민간인 숨짐
- 8명 조사에서 확인
- 민간인 다침
- 전체 수 미상 전체 수 없음
- 무장대 숨짐
- 2명 조사에서 확인
- 무장대 다침
- 기록 없음 전체 수 없음
- 03
큰 변화 강한 진압명령과 초토화작전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에서 5km 넘게 떨어진 지역의 통행을 막는 포고문을 냈고, 중산간 마을을 없애는 강한 진압이 이어졌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1948년 10월 11일부터 1949년 3월 1일까지 위원회 인정 희생자 9,709명이 집중됐습니다. 2019년 집계 14,442명의 67.2%입니다.
- 민간인 숨짐
- 시기별 사망 분리 없음 전체 수 없음
- 민간인 다침
- 시기별 부상 분리 없음 전체 수 없음
- 국군 숨짐
- 이 시기 100명 조사에서 확인 · 보고서의 날짜 오류를 바로잡은 시기 합계
- 04
남원리·위미리 동시공격
남로당 무장대가 남원리와 위미리를 한꺼번에 공격하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미군 보고에 주민 50명이 숨지고 70명이 다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뒤이은 반격에서는 무장대 30명이 사살됐다는 경찰보고가 남아 있습니다.
- 민간인 숨짐
- 50명 당시 보고 숫자 · 미군 보고에 실린 경찰보고
- 민간인 다침
- 70명 당시 보고 숫자 · 미군 보고에 실린 경찰보고
- 무장대 숨짐
- 30명 보고 당시 보고 숫자
- 무장대 다침
- 기록 없음 전체 수 없음
- 05
자운당 매복과 뒤이은 주민 총살
무장대가 이동 중인 군부대를 매복 공격했습니다. 아홉 날 뒤 군인들은 같은 곳으로 주민들을 끌고 가 총살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상세 작전 기록에는 군인 10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습니다. 추가조사는 12월 28일 자운당에서 주민 64명이 희생됐다고 확인했습니다.
- 민간인 숨짐
- 64명 조사에서 확인
- 국군 숨짐
- 10명 조사에서 확인 · 9연대 9명·2연대 1명
- 국군 다침
- 2명 조사에서 확인
- 무장대 다침
- 기록 없음 전체 수 없음
- 06
의귀리 전투와 뒤이은 주민 총살
무장대 약 200명이 의귀리의 2연대 중대를 공격했지만 물러났습니다. 그 뒤 군인들이 학교에 갇혀 있던 주민들을 총살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미군 보고는 무장대 51명 사망, 국군 2명 사망·10명 부상으로 적었습니다. 추가조사에서 이름이 확인된 국군 사망자는 4명입니다. 주민 50여 명도 뒤이은 보복으로 희생됐습니다.
- 민간인 숨짐
- 50여 명 조사에서 확인 · 추가조사에서 파악한 보복 총살 희생
- 국군 숨짐
- 4명 조사에서 확인 · 추가조사에서 이름을 확인
- 국군 다침
- 10명 보고 당시 보고 숫자 · 미군 정보보고
- 무장대 숨짐
- 51명 보고 당시 보고 숫자 · 미군 정보보고
- 무장대 다침
- 기록 없음 전체 수 없음
- 07
동복리·북촌리 매복과 북촌 주민 학살
무장대가 이틀에 걸쳐 군용트럭을 공격해 군인들이 숨졌습니다. 군인들은 북촌리와 동복리 주민에게 보복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추가조사는 1월 16일 동복리에서 군인 4명이 숨진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7~18일 북촌리 주민 299명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 민간인 숨짐
- 299명 조사에서 확인 · 1월 17~18일 북촌리 주민
- 국군 숨짐
- 4명 이상 조사에서 확인 · 16일 4명 확인, 17일에도 전사자 발생
- 국군 다침
- 수 미상 전체 수 없음
- 08
큰 변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사망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경찰과의 교전에서 숨졌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지도자를 잃은 뒤 큰 규모의 무장대 활동은 빠르게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산속의 작은 무장조직과 진압작전은 더 이어졌습니다.
- 무장대 숨짐
- 1명 조사에서 확인 · 이덕구
- 09
긴 시기 한국전쟁과 예비검속 희생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위험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을 재판 없이 미리 붙잡았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모슬포 경찰서에 갇힌 344명 가운데 252명이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됐습니다. 이 사건은 무장대와의 전투가 아니라 국가기관이 구금한 주민에게 한 불법 살해였습니다.
- 민간인 숨짐
- 252명 조사에서 확인 ·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
- 10
긴 시기 마지막 큰 진압작전
해병대와 경찰 합동부대, 뒤이어 무지개부대가 한라산의 남은 무장대를 상대로 작전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해병대 작전 기록에는 무장대 50여 명 사살, 무지개부대 기록에는 7명 사살이 적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기간의 작전 결과이므로 하나의 전체 합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 국군 숨짐
- 종결 시기 16명 조사에서 확인 · 1950.6.25~1954.9.21 전체 시기
- 국군 다침
- 종결 시기 1명 조사에서 확인 · 1950.6.25~1954.9.21 전체 시기
- 무장대 숨짐
- 50여 명·7명 보고 당시 보고 숫자 · 서로 다른 두 작전의 기록
- 무장대 다침
- 기록 없음 전체 수 없음
- 11
큰 변화 한라산 통행금지 해제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통행금지를 풀었습니다.
피해에 끼친 영향1947년부터 이어진 4·3의 공식 사건 기간이 끝나는 날입니다. 끝난 날짜가 있다고 해서 살아남은 사람의 상처까지 이날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변화가 일어난 바로 그날의 피해 숫자는 따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공격 뒤에
폭력과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4월 3일 무장공격을 시작한 책임과 무장대가 주민을 공격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국가기관이 주민을 재판 없이 죽인 책임도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보면 앞선 피해가 다음 불법을 정당하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 또렷해집니다.
이 연대표는 빈 기록을 추정해서 채우지 않았습니다. ‘확인’, ‘당시 보고’, ‘전체 수 없음’을 나눈 이유입니다.
숫자의 출처를
쪽수로 남겼습니다
- 시기별 전체 희생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84~89쪽, 특히 표 2-29
- 국방경비대·국군 피해같은 보고서 631~649쪽, 특히 표 8-7과 날짜 바로잡기 설명
- 큰 사건별 피해같은 보고서 160~170·198·213~215·249~250·289~291·637~644쪽
- 현재 15,218명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 안내, 2026년 8월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