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누어 점령
일본의 지배가 끝난 뒤 미군은 남한에, 소련군은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좌익과 우익은 서로 다른 나라를 세우려 했습니다. 9월에는 미군정이 남한에 들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법과 행정 일을 맡았습니다.
제주의 봄은 오래도록,
그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주 4·3, 진실을 찾는 여정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기록을 따라
아픈 어제를 밝히고, 더 나은 내일로 걸어갑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곳에서,
우리의 봄은 다시 시작됩니다.
1945년 해방 뒤부터 살펴봅니다.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두고 싸운 과정, 남로당 조직이 커진 과정, 무장공격과 진압, 주민 피해, 사건이 끝날 때까지 날짜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해방 뒤 새 정부가 아직 없었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누어 점령했습니다.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두고 좌익과 우익이 맞섰습니다. 제주에서는 인민위원회와 좌익 조직이 커졌습니다. 3·1 사건은 갈등을 크게 키웠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뒤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무장공격을 정하고 사람과 무기를 준비했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끝난 뒤 미군은 남한에, 소련군은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좌익과 우익은 서로 다른 나라를 세우려 했습니다. 9월에는 미군정이 남한에 들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법과 행정 일을 맡았습니다.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조직은 경찰, 마을 행정, 교육 등에 큰 힘을 가졌습니다. 미군은 9월 28일 제주에 들어왔고, 실제로 제주를 다스리는 일은 11월부터 시작했습니다.
남한 농가 가운데 남의 땅만 빌려 농사짓는 집이 48.7%였습니다. 자기 땅과 남의 땅에서 함께 농사짓는 집도 많았습니다. 땅과 먹고사는 일이 불안해지자 빠르게 땅을 나누자는 주장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이 왜 남로당에 들어갔는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세 정당이 합쳐 남로당을 만들었습니다. 제주에서도 좌익 조직이 커졌고 일부 교사와 학생의 연결망도 사람을 모으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관덕정 앞에서 경찰이 총을 쏴 주민 6명이 숨지고 6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 일로 갈등이 빠르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4·3이 일어난 모든 이유를 이날 하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절에 총을 쏜 책임자를 벌하라고 요구하며 큰 파업을 이끌었습니다. 관공서와 회사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그 뒤 미군정과 경찰이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남로당의 연락을 맡던 사람이 경찰 쪽으로 돌아서면서 비밀조직이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신촌리를 갑자기 덮쳐 많은 주민을 잡아갔습니다. 경찰이 확보했다는 문서가 진짜인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남로당이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하라고 지시한 뒤 제주 곳곳에서 시위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사흘 동안 약 290명을 붙잡았습니다. 그 뒤 제주 전역에서 많은 사람을 잡아갔습니다.
김용철·양은하·박행구 등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과 심한 폭력 뒤 차례로 숨졌습니다. 경찰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분노와 두려움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삼룡의 말에 따르면 제주와 각 지역 책임자 19명이 모였습니다. 12명은 무장공격에 찬성했고 7명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토론 끝에 공격하기로 정했습니다.
군사위원회와 유격대·자위대·특경대를 만들었습니다. 무기, 먹을 것, 알림 일을 누가 맡을지도 나누었습니다. 3월 28일에는 4월 3일 새벽 2~4시에 공격하기로 정했습니다.
여러 곳을 한꺼번에 공격한 뒤 싸움을 멈추기 위한 대화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라리에서 집에 불을 지른 사건 뒤 대화가 무너지고 진압은 더 강해졌습니다. 무장대가 선거를 막아 제주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가 됐습니다.
무장대 약 350명이 경찰지서 24곳 가운데 12곳과 우익 인사의 집을 같은 새벽에 공격했습니다. 경찰과 우익 인사뿐 아니라 그 가족과 일반 주민도 희생됐습니다.
구엄리에서는 공격 대상으로 찍힌 우익 인사와 가족이 공격받았습니다. 10대 자매를 포함해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쳤습니다.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전체 지휘자 김달삼이 만났습니다. 싸움을 멈추고 무기를 차례로 내려놓으며 산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피를 더 흘리지 않고 끝낼 수 있었던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우익청년단원이 오라리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무장대가 한 일처럼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 뒤 싸움을 멈추려던 대화가 빠르게 흔들렸습니다.
딘 군정장관 등이 제주에서 회의를 연 뒤 김익렬 연대장을 박진경으로 바꿨습니다. 정부 보고서는 이때부터 무력을 써서 진압하겠다는 방향이 굳어졌다고 봅니다.
무장대는 투표소를 공격하고 주민을 억지로 산으로 데려가 선거를 방해했습니다. 투표한 사람이 너무 적어 북제주군 두 선거구의 선거는 5월 26일 무효가 됐습니다.
경비대 군인들이 부대를 떠나 무장대에 들어가고,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군인에게 총을 맞아 숨졌습니다. 남로당은 북한 선거를 돕는 일을 벌였고 김달삼은 북한으로 갔습니다. 양쪽의 무력싸움이 더 커졌습니다.
모슬포에 있던 경비대 군인 41명이 총과 총알을 들고 부대를 떠났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무장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 안에서도 생각이 서로 달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강한 진압을 이끌던 박진경 연대장이 숙소에서 부하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남로당 쪽 기록에는 박진경과 장교들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군 안 비밀 당조직도 움직였습니다. 다만 서울의 남로당 중앙조직이 글로 내린 암살 명령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군 보고서에는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고, 지시도 전남도당에서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6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 서울의 남로당 중앙조직이 4월 3일 공격을 미리 허락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군 보고서는 서울의 남로당 중앙조직이 다른 정당에 보냈다는 문서를 소개했습니다. 그 문서에는 제주 무장싸움이 잠시 줄었고 다시 커질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문서의 원본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서울 중앙조직이 사건 뒤 상황을 알았다는 흔적과 그 조직이 직접 명령했다는 증거는 나누어 봐야 합니다.
무장대는 주민에게 북한 선거를 지지한다는 서명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빈 종이에 도장을 찍게 하기도 했습니다. 거부한 주민은 위협하거나 공격했습니다. 김달삼은 제주를 떠나 북한의 해주대회에 갔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됐습니다.
군과 경찰은 산간 마을의 집을 불태우고 주민을 해안 마을로 옮기는 강한 진압을 벌였습니다. 무장대도 자기들을 돕지 않은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주민 희생이 가장 크게 늘었습니다.
제9연대, 제주로 더 보낸 군인, 해군 배, 경찰을 한곳에서 이끄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만들어졌습니다. 더 높은 계급의 지휘관이 제주 진압을 맡게 됐습니다.
군은 10월 20일부터 허락 없이 해안에서 5㎞ 넘게 떨어진 곳이나 산으로 다니는 사람을 ‘폭도’, 곧 무장대원으로 보고 총으로 쏘겠다고 알렸습니다. 이 발표 뒤 산간 마을의 집을 불태우고 주민을 옮기는 큰 진압이 시작됐습니다.
계엄령은 전쟁이나 큰 혼란이 있을 때 군대가 치안과 행정을 맡게 하는 긴급 명령입니다. 당시에는 계엄령을 내릴 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명령이 법에 맞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무장대는 남원리와 위미리를 공격했습니다. 여성, 어린이, 노인을 포함한 주민을 죽이고 먹을 것을 빼앗았으며 집을 불태웠습니다.
무장대가 세화리를 공격해 약 150채를 불태우고 주민 약 50명을 살해했습니다. 이후 경찰의 보복 총살도 이어졌습니다.
무장대는 자기들을 돕지 않은 두모2구 주민을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공격하고 먹을 것을 빼앗았습니다. 2003년 보고서는 희생자를 13명으로, 2020년 추가 조사보고서는 14명으로 적었습니다.
여수·순천 사건 진압 뒤 대전에 있던 제2연대가 제주로 들어와 제9연대와 자리를 바꿨습니다. 제2연대는 주민을 내려오게 한 뒤 무장대와 주민을 떼어 놓고 산을 수색한다는 세 단계 계획을 내세웠습니다.
무장대는 마을을 지키던 사람과 주민을 죽였습니다. 먹을 것을 빼앗고 학교와 집도 불태웠습니다. 보고서에는 희생자 비석에 3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나옵니다.
무장대가 군대 차를 공격해 군인 2명이 숨졌습니다. 그 뒤 군인들은 북촌 주민들을 학교와 들판에 모아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먼저 군대를 공격한 책임과 죄 없는 주민을 죽인 책임은 따로 나누어 봐야 합니다.
큰 무장대가 거의 무너진 뒤에도 작은 무장대의 공격과 군·경찰의 진압은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리 붙잡아 둔 주민들이 많이 희생됐습니다. 1954년에 한라산 출입 금지가 풀리면서 4·3의 공식 기간이 끝납니다.
정부는 군인, 경찰, 우익청년단을 한곳에서 이끄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었습니다. 유재흥 사령관은 산에 있는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알리는 한편 큰 수색 작전을 이끌었습니다.
1년 전 무효가 된 북제주군 두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다시 뽑았습니다. 전투사령부가 제주를 통제하는 가운데 선거가 열렸고 홍순녕과 양병직이 당선됐습니다.
경찰부대가 무장대와 싸우는 과정에서 전체 지휘자 이덕구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보고서에는 이때 큰 무장대가 이미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정부와 군·경찰은 위험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을 재판 없이 미리 붙잡아 두었습니다. 이를 ‘예비검속’이라고 합니다. 7월 말부터 8월 사이 제주·서귀포·모슬포에서 붙잡혀 있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총살됐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뒤, 남아 있던 무장대가 중문면 하원리를 공격해 주민의 집 99채를 불태웠습니다. 그 뒤에도 작은 규모의 무장공격이 이어졌습니다.
무장대가 국군과 경찰인 것처럼 꾸미고 제주방송국을 습격했습니다. 방송과장 김두규와 직원 채종식·김석규를 끌고 갔고, 세 사람은 며칠 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정부 보고서는 16일, KBS 추모비는 15일로 적어 두 날짜를 함께 표시합니다.
경찰 100사령부와 육군 무지개부대는 한라산에서 함께 수색했습니다. 남아 있던 무장대를 찾고 갑자기 공격하는 작전을 벌였습니다.
한라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명령이 풀렸습니다. 주민들이 마을 성을 지키는 일도 끝났습니다. 특별법과 보고서는 이날을 제주4·3의 공식 기간이 끝난 날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