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대
100명산으로 들어가 앞에서 싸우고 경찰지서와 공격 대상으로 정한 집을 습격한 조직
제주의 봄은 오래도록,
그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주 4·3, 진실을 찾는 여정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기록을 따라
아픈 어제를 밝히고, 더 나은 내일로 걸어갑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곳에서,
우리의 봄은 다시 시작됩니다.
남로당 무장조직과 국방경비대·국군 지휘부를 따로 보여줍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확인된 행동, 논쟁이 되는 주장, 아직 모르는 부분을 나누어 읽을 수 있습니다.
김달삼과 제주도당 지도부, 지역별 무장부대
조직 그림부터 보기 →02 · 진압을 맡은 쪽국방경비대·국군김익렬부터 유재흥까지 바뀐 지휘관과 명령
지휘 흐름부터 보기 →남로당 쪽도 자료에 따라 ‘인민유격대’, ‘인민해방군’, ‘무장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페이지는 당시 자료가 쓴 이름과 지금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말을 함께 씁니다.
3월 28일 기록에 나온 첫 조직 그림입니다. 4월 뒤에 바뀐 조직과 섞지 않았습니다.
평소 당조직을 싸움을 준비하는 조직으로 바꿈
군사위원장이 공격 준비와 무장대 전체 지휘를 함께 맡음
김달삼군사위원장·총사령관(전체 지휘자) →산으로 들어가 앞에서 싸우고 경찰지서와 공격 대상으로 정한 집을 습격한 조직
사람을 더 모으고, 마을과 무장부대 사이의 연락, 먹을 것과 돈을 대는 일을 맡음
지휘부를 지키고 살피는 조직. 뒤에는 없어지고 지휘부의 여러 부서로 나뉨
어디에 적혀 있나요? ·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가져와 적은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159~161·185~187쪽입니다. 미군 보고는 붙잡힌 사람의 말과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므로, 누가 만든 자료인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정부 보고서는 전남도당이 보낸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름과 서울의 남로당 중앙조직이 4월 3일 공격 전에 명령했다는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래 이름은 정부 보고서가 가져와 적은 남로당 쪽 자료에 나옵니다. 다만 그 자료는 서로 다른 때의 사람을 한 표에 모았을 수 있습니다.
‘전체 조직원 501명’과 ‘직접 싸운 유격대 120명’은 다른 숫자입니다. 둘을 같은 뜻으로 보면 안 됩니다.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군사위원회가 바로 지휘한 특경대 20명이었습니다. 4월 3일 공격 전의 숫자입니다.
각 지역의 유격대를 제주 전체 지휘부 아래 세 부대로 묶었습니다. 특경대는 없애고 그 사람들을 지휘부의 여러 부서로 나누었습니다.
군과 경찰이 더 많이 들어오자 조직을 240명으로 줄였습니다. 뒤에는 네 지역부대 240명과 제주 지휘부 26명, 모두 266명으로 다시 나누었습니다.
지도부 35명, 연락을 맡은 사람 34명, 유격대 120명, 특별 임무를 맡은 사람 312명입니다. 501명 모두가 총을 들고 싸운 것은 아닙니다. 실제 유격대는 120명으로 따로 적혀 있습니다.
4·3이 이어진 동안 무장대 전체는 보통 50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4월 3일 공격에는 약 350명이 나온 것으로 봅니다. 7월 문서의 501명에는 연락·특별 임무·지휘를 맡은 사람까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지휘관이 바뀔 때마다 대화, 수색, 포고문, 하산 권유 등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누가 어느 때 책임자였는지 먼저 알아야 뒤 시기의 일을 앞사람에게 잘못 씌우지 않습니다.
김달삼과 만나 싸움을 멈출 방법을 찾음
자세히 →큰 수색·체포 작전을 지휘하다 부하들에게 암살됨
자세히 →박진경 뒤 지휘를 맡아 6월 말 작전을 진행
자세히 →10월 17일 5㎞ 밖 통행자를 총살하겠다는 포고문 발표
자세히 →제2연대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강경 작전을 지휘
자세히 →군·경찰·우익청년단을 한 지휘 아래에 둠
자세히 →지휘관의 명령 책임과 현장 군인의 행동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추가 조사보고서가 확인한 군인 피해자는 162명입니다. 무장대의 공격으로 숨진 군인도 함께 기억하되, 주민에게 불법을 저지른 명령과 행동도 사건별로 따로 기록합니다.
근거 ·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633~645쪽이름을 누르면 맡은 일, 중요한 행동, 그 뒤의 일, 아직 모르거나 논쟁이 되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공격을 정하고 준비하거나 지역 무장대를 이끈 사람들
무장공격을 하자고 처음 제안하고, 사람과 무기를 준비해 4월 3일 여러 곳을 한꺼번에 공격하도록 이끈 핵심 책임자입니다. 1948년 8월 제주를 떠난 뒤 북한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 뒤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유격대를 이끌다가 1950년 강원도 정선에서 숨진 것으로 대한민국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김달삼이 제주를 떠난 뒤 무장대 전체를 이끈 두 번째 책임자입니다. 하지만 처음 무장공격을 정한 신촌 회의에는 이덕구가 없었다는 참가자의 말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무장공격을 정한 회의에서 공격에 찬성한 12명 중 한 사람입니다. 4월 3일 뒤에는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숨겨 둔 남로당 장소에서 정치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훗날 일본에서 자신들이 당시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1947년 3·1 사건 뒤 남로당의 대책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1948년 미군 보고에는 제주도당의 소식과 주장을 알리는 책임자로 나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정치 활동을 알리는 일을 맡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자료마다 맡았다는 자리와 때가 달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한 종류 자료에만 나옴정부 보고서가 가져온 남로당 쪽 간부 명단에 군사 책임자이자 정보를 맡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은 서로 다른 때의 책임자를 한꺼번에 적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달삼과 같은 때 군사조직을 함께 이끌었다고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한 종류 자료에만 나옴정부 보고서가 가져온 남로당 쪽 조직표에는 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을 묶은 제2연대, 곧 2·7지대의 지휘자로 나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공식 자료가 적기 때문에 그 밖의 삶은 짐작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진압 방법과 부대 명령을 맡았던 군 지휘관들
4·3이 시작된 뒤 처음 제주에서 군을 지휘한 연대장입니다. 무장대를 모두 주민과 같은 편으로 보지 않았고, 김달삼을 만나 총을 내려놓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5월 6일 연대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김익렬 뒤에 제주 군 지휘를 맡아 큰 수색과 체포 작전을 벌였습니다. 6월 18일 잠을 자던 중 부하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박진경을 둘러싼 ‘30만 희생 발언’, 체포 숫자, 초토화작전 책임은 확인된 사실과 주장을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네 가지 쟁점까지 확인하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박진경이 암살된 뒤 제11연대를 맡았습니다. 6월 21일부터 26일까지 뒤이은 진압 작전을 지휘했고, 7월 제11연대가 제주에서 물러날 때 함께 떠났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1948년 7월 제9연대장이 됐습니다. 10월 17일 해안에서 5㎞ 넘게 떨어진 곳을 허락 없이 다니면 무장대로 보고 총을 쏘겠다는 포고문을 냈습니다. 이때부터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옮기는 큰 작전과 대량 희생이 이어졌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1948년 12월 말 제2연대를 이끌고 제주에 왔습니다. 주민을 설득해 내려오게 하고, 무장대와 주민을 떼어 놓은 뒤 산을 수색한다는 세 단계 계획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시기에 북촌·봉개·용강·회천 등에서 큰 주민 희생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자세히 보기 →여러 자료에서 확인1949년 3월 군·경찰·우익청년단을 한데 지휘하는 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이 됐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 주겠다고 알리는 한편 큰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내려온 주민들이 뒤에 군법회의에 넘겨진 문제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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