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왜 일어났을까요?

4·3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해방 뒤에는 자유로운 선거를 중요하게 여긴 쪽과 공산당 중심의 나라를 만들려는 쪽이 맞섰습니다. 제주에서는 좌익 조직이 커졌고,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무장공격을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을 1945년부터 차례로 살펴봅니다.

그림으로 먼저 보기

세 장면으로 이해하는
4·3 이전의 이야기

긴 글을 읽기 전에 ‘어떤 나라를 세울지 벌인 다툼’, ‘먹고사는 어려움’, ‘남로당의 공격 준비’를 그림으로 먼저 살펴보세요.

해방의 기쁨 속에서 한반도의 분할 점령과 체제 선택을 마주한 제주 주민을 그린 설명용 삽화
01

해방 뒤,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두고 맞섰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끝났지만 새 정부는 아직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선거를 중요하게 여긴 쪽과 공산당 중심의 나라를 만들려는 쪽이 맞섰습니다.

땅과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서로 다른 정치 주장을 듣는 1940년대 제주 농민을 그린 설명 그림
02

땅과 먹고사는 문제에 여러 정치 주장이 퍼졌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지만 자기 땅이 없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땅을 빠르게 나누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제주 지도와 지시망을 중심으로 비밀 회의와 무장 준비를 진행하는 조직을 그린 설명용 삽화
03

조직을 넓힌 뒤 무장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마을·교사·학생 사이에 조직을 넓혔습니다. 지도부는 회의와 투표로 공격을 정하고 군사조직과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설명을 위해 새로 만든 그림 · 실제 사건 사진이나 실제 인물의 얼굴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알아둘 점3·1 사건은 갈등을 크게 키웠습니다. 하지만 그 일 하나만으로 4·3이 일어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1945년 해방 뒤부터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두고 여러 정치세력이 경쟁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는 회의를 열고 찬반을 나눈 뒤 사람과 무기를 준비해 여러 곳을 한꺼번에 공격했습니다. 무장공격을 시작한 직접 책임은 이 지도부에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자기 땅이 없는 농민이 많았습니다

1945년 말 남한 농가 가운데 남의 땅만 빌려 농사짓는 집이 48.7%였습니다. 땅을 빠르게 나누자는 주장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직이 커진 길

교사·학생·마을까지 이어진 조직

추가 보고서는 일부 교사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 참여하고 남로당 지도부에도 들어갔다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생도 아래 조직에서 활동했습니다.

공격을 고른 과정

정치 다툼이 제주에서 무력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남로당은 땅과 생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직했습니다. 제주도당 지도부는 무기를 써서 나라의 방향을 바꾸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1945~1948

배경부터 공격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어느 자료에 적혀 있는지를
단계마다 함께 볼 수 있습니다.

  1. 01

    해방 뒤, 나라를 다스릴 정부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기관도 무너졌습니다. 미군은 남한에, 소련군은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두고 좌익과 우익이 맞선 일은 제주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적혀 있나요?

    국가기록원은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이 38선 남쪽의 경찰·행정 일을 맡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남한을 다스렸다고 적었습니다.

  2. 02

    제주에서 좌익 조직이 빠르게 커졌습니다

    제주에서는 새 나라를 준비하려고 만든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조직은 경찰, 마을 행정, 교육에 큰 힘을 가졌습니다. 청년·농민·여성 조직도 만들어졌습니다. 추가 조사보고서는 일부 교사와 학생이 이런 조직과 남로당 활동에 깊이 참여했다고 적었습니다.

    어디에 적혀 있나요?

    추가 조사보고서 562·604쪽에는 일부 학교에서 정치 생각 때문에 갈등이 생긴 일, 교사 출신 남로당 지도자, 학생 조직 활동이 자세히 나옵니다.

  3. 03

    갈등이 커진 뒤 무장공격을 선택했습니다

    3·1절에 경찰이 총을 쏜 일, 큰 파업, 많은 사람을 잡아가고 고문해 죽게 한 일로 갈등이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무장공격이 저절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회의를 열고 찬반을 나눈 뒤 공격하기로 정했습니다. 사람·무기·먹을 것·공격 시간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어디에 적혀 있나요?

    진상조사보고서 157~162쪽에는 19명이 모인 회의, 12대 7 결정, 군사조직과 320명 준비, 4월 3일 공격 시간 결정이 나옵니다.

  4. 04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무력으로 막았습니다

    유엔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선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갈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지켜봤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력으로 막았습니다. 뒤에는 북한 선거를 지지하는 빈 종이에 도장을 찍으라고 주민에게 강요했습니다.

    어디에 적혀 있나요?

    국가기록원에는 유엔이 지켜본 선거와 헌법·정부를 만든 과정이 나옵니다. 정부 보고서에는 투표소 공격, 주민을 산으로 데려간 일, 빈 종이에 도장을 찍게 한 일이 나옵니다.

공격을 정하고 이끈 사람들

조직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결정하고 명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달삼을 중심으로 만든 군사조직과 그 뒤 지휘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누르면 맡은 일과 그 뒤의 삶이 나옵니다.

군사조직 전체 책임자

김달삼

무장공격을 제안하고 전체 사령관을 맡음. 뒤에는 북한 쪽 대회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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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책임자

이삼룡

신촌 회의에서 공격에 찬성. 훗날 지도부가 잘못 판단했다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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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전체 지휘자

이덕구

첫 결정회의에는 없었지만 김달삼이 떠난 뒤 무장대 전체를 이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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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대 전체 조직 그림 보기 →
확인된 것만 말합니다

자료로 확인된 강요와
아직 더 찾아봐야 할 주장

자료에서 확인됨

선거 방해, 빈 종이에 도장 강요, 돕지 않은 주민 공격

투표소를 공격하고 주민을 산으로 데려간 일, 북한 선거를 지지한다는 빈 종이에 도장을 찍게 한 일, 거부한 주민을 위협하거나 죽이고 집을 불태운 일은 보고서와 증언에서 확인됩니다.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함

“남로당 가입을 거부하면 모두 총살했다”는 주장

첨부된 두 보고서만으로는 제주 모든 곳에서 이런 일이 흔히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장소, 피해자 이름, 실제 증언이 확인되는 사건부터 하나씩 더하겠습니다.

자료를 직접 확인하기

결론만 보지 않고
누가 만든 자료인지도 봅니다

국가기록원 · 미군정청 설치 ↗우리역사넷 · 땅을 나눈 농지개혁 ↗국가기록원 ·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과정 ↗역사 자료 읽는 법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