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탄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친 뒤 군중이 술렁였고, 경찰의 총격으로 길을 지나던 사람까지 희생됐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 102~113쪽 · 공식 사건일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3·1절 발포 자세히 보기 →제주의 봄은 오래도록,
그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주 4·3, 진실을 찾는 여정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기록을 따라
아픈 어제를 밝히고, 더 나은 내일로 걸어갑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곳에서,
우리의 봄은 다시 시작됩니다.
남로당 관계자와 경찰, 무장대에게 피해를 본 주민, 군인이나 경찰에게 피해를 본 생존자의 말을 나누어 모았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말했는지도 함께 적었습니다.
큰 글씨는 증언을 그대로 옮긴 말이 아닙니다. 사이트가 이해하기 쉽게 줄인 증언 요약입니다. 누가 말했는지와 원래 자료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말을 탄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친 뒤 군중이 술렁였고, 경찰의 총격으로 길을 지나던 사람까지 희생됐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 102~113쪽 · 공식 사건일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3·1절 발포 자세히 보기 →제주도청에서 시작한 파업이 사흘 사이 제주 전역의 거의 모든 직장으로 퍼졌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
진상조사보고서 114~123쪽 · 공식 사건일지 1947년 3월 10일
3·10 제주 총파업 자세히 보기 →경찰서장이 이야기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에 모였는데 주민 수백 명이 경찰에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했는지 캐물으며 고문했다고 말했습니다.허춘섭 · 당시 신촌리 주민
진상조사보고서 154~155쪽
신촌리 조직부 사건 자세히 보기 →서울의 남로당 중앙조직이 내린 명령은 없었고 제주 조직이 스스로 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은 당시 상황을 잘못 보았고 김달삼의 ‘무력으로 싸우자’는 주장에 끌려갔다고 했습니다.이삼룡 · 2002년 7월 11일에 들은 말
진상조사보고서 158쪽
신촌 무장공격 결정회의 자세히 보기 →첫 부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미군 고문관이 다시 부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장시영 의사는 몸 밖에서 가해진 충격으로 생긴 뇌출혈이 결정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목격자는 경찰이 김용철을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때렸다고 말했습니다.두 차례 부검과 경찰관 5명의 유죄판결
진상조사보고서 149~152쪽 · 제주신보 1948년 3월 12일 · 조선일보 1948년 5월 9일
김용철 고문 사망 자세히 보기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모슬포에서 경찰관 2명이 수감자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동료 경찰에게 체포됐다고 적었습니다. 함께 갇혔던 사람은 몽둥이, 널빤지, 물을 이용한 고문이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경찰관 2명의 즉시 체포와 6명의 유죄판결
진상조사보고서 150~152쪽 · 미 24군단 G-2 정기보고 제794호 1948년 3월 27일
양은하 고문 사망 자세히 보기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모두 320명을 조직했다고 적었습니다.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등도 준비했다고 나옵니다.『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 159~161쪽
3·15 공격 준비회의 자세히 보기 →3월 20일 새별오름에서 훈련 중이던 자위대원들과 경찰·우익 청년단이 충돌했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
공식 사건일지 1948년 3월 20일
새별오름 자위대 충돌 자세히 보기 →밖을 살피던 경찰이 다가오는 무리를 보고 겁을 주려고 하늘에 총을 쏘자 공격대가 물러갔다고 말했습니다.정도일 · 당시 조천지서 순경
진상조사보고서 171쪽
조천지서 공격 자세히 보기 →경찰지서 공격이 실패한 것과 상관없이 집과 가족을 공격했습니다. 4월 3일 공격 때 일반 주민도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정부 보고서·무장대 측 작전기록
진상조사보고서 170~171쪽
구엄리 주민 공격 자세히 보기 →군과 무장대 지도부가 직접 만나 전투 중지와 무장 해제 방법에 합의했다고 정부 보고서는 적고 있습니다.김익렬·김달삼 회담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190~198쪽 · 구억국민학교 터 현장 기록
4·28 평화협상 자세히 보기 →김익렬 연대장과 정보주임 이윤락은 현장을 조사해 우익청년단의 방화로 판단했지만, 미군 정보요원은 경찰 보고와 다르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오라리 방화 사건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198~204쪽 · 김익렬·이윤락 증언 · NARA 영상 ‘May Day on Cheju-Do’
오라리 방화 자세히 보기 →미군 보고와 뒤의 조사에는 이탈 41명, 체포 20명, 회수 소총 19정과 실탄 3,500발이 적혀 있습니다. 한 군인 증언은 이탈자 대부분이 제주 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41명의 이유가 모두 같았다는 뜻은 아닙니다.제9연대 집단 이탈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178~180·216~217쪽 · 미군 G-2 정기보고 제842·844호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653~654쪽
제9연대 군인 41명 이탈 자세히 보기 →군법회의 기록은 손선호의 직접 사격과 문상길 등 여러 군인의 계획 참여를 보여줍니다. 피고인들은 박진경의 대규모 체포 작전에 반대해 암살했다고 진술했지만, 그 동기가 살해를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박진경 피살 사건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216~220·225~228쪽 · 1948년 8월 고등군법회의 보도 · 미군 G-2 정기보고 제863호
박진경 대령 피살 자세히 보기 →10월 23일 무장대가 제주 북쪽의 세 지서를 같은 날 공격했다고 적혀 있습니다.세 지서 동시공격 기록
공식 사건일지 1948년 10월 23~24일
10·23 세 지서 동시공격 자세히 보기 →위미리가 무장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도 불타는 집에서 물건을 꺼내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고 했습니다.현봉협 · 당시 위미리 교사
진상조사보고서 439~440쪽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89~296쪽
위미리 주민 공격 자세히 보기 →지형종은 무장대가 주민이 어느 편인지 묻지도 않고 공격했고, 자신의 가족과 친척 8명이 희생됐다고 말했습니다. 추가 조사에서는 어린아이와 피난 온 주민, 공격 뒤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도 확인했습니다.지형종 · 가족과 친척 8명 희생
진상조사보고서 438~439쪽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85~289쪽
세화리 주민 공격 자세히 보기 →두모2구에서는 무장대가 되려고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을을 스스로 지키며 산에 있는 무장대를 돕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 대상으로 찍혔다고 했습니다.좌옥윤 · 2002년 2월 27일에 들은 말
진상조사보고서 440~441쪽
두모2구 주민 공격 자세히 보기 →발굴 때 나온 생활용품은 가족들이 굴에서 숨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편 무장 장비 곁의 유골도 있어 개인별로 피난 주민인지 무장 활동 관계자인지 더 나누어 확인해야 합니다.다랑쉬굴 희생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299~301쪽 · 공식 사건일지 1948.12.18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501쪽
다랑쉬굴 질식 희생 자세히 보기 →이만식은 토벌작전에 다녀오면 양민증을 준다는 말을 믿고 스스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농업학교에서 손이 묶인 뒤 박성내로 끌려갔고, 총을 맞아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빠져나왔다고 말했습니다.박성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만식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145~147쪽 · 이만식 증언 2006년 7월 20일
박성내 집단희생·조천면 자수 사건 자세히 보기 →제주MBC ‘나는 말한다’는 한 마을에서 군경 때문에 생긴 피해와 무장대 공격 피해를 함께 들려줍니다.애월리 주민들
제주MBC ‘나는 말한다’ · 애월리
애월리 자세히 보기 →제주MBC ‘나는 말한다’ 저지리 편에는 고문 피해와 무장대 공격에 대한 주민의 말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저지리 주민들
제주MBC ‘나는 말한다’ · 저지리
저지리 자세히 보기 →공식 사건일지는 약 70명으로 적었고, 추가 조사에서는 이름·나이·희생 장소를 대조해 78명을 확인했습니다. 명단에는 어린이와 노인도 있습니다.도평리 위장 작전 기록
진상조사보고서 298~300쪽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81~285쪽
도평리 위장 작전과 희생 자세히 보기 →추가 보고서는 약 80명의 희생이 모두 전투 뒤에 생긴 것은 아니라고 정리합니다. 약 20명은 전투 전 이틀에, 약 60명은 전투 직후 보복으로 희생됐습니다.의귀리 교전·집단희생 기록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3~216쪽 · 미군 보고 · 현의합장묘 발굴 기록
의귀리 교전과 학교 집단희생 자세히 보기 →정부 보고서는 마을 입구의 비석에 이날 희생된 3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적었습니다.성읍리 희생자 명단·마을 비석
진상조사보고서 441~442쪽
성읍리 주민 공격 자세히 보기 →두 사람은 어릴 때 북촌리 집단학살을 겪었습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사람들 앞에서 말했습니다.고완순·윤옥화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167~173쪽 · 제15회 4·3증언본풀이 마당
북촌리 자세히 보기 →동광리 주민들은 불탄 마을을 떠나 굴과 한라산 쪽으로 피신했다가 눈 위 발자국 때문에 붙잡혔고, 중문을 거쳐 서귀포 수용소에 갇힌 뒤 정방폭포로 끌려갔다고 전합니다.정방폭포 부근 집단희생 기록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7~220쪽 · 공식 사건일지 1949.01.22
정방폭포 부근 집단희생 자세히 보기 →무장대가 군 병력을 공격해 16명을 죽이고 소총 150정을 가져갔다고 적혀 있습니다.김녕리 기습 기록
공식 사건일지 1949년 2월 4일
김녕리 군 병력 기습 자세히 보기 →유족과 주민은 군인이 도두리 청년들에게 죽창을 들게 하고, 붙잡혀 온 사람들이 마을을 공격한 자들이라고 말하며 찌르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습니다.미군사고문단 기록
미군 G-2 정기보고 제1077호(1949.03.03)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65~269쪽
도두리 죽창 희생 자세히 보기 →유족들은 1956년에야 섯알오름 유해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한림 쪽 62구와 모슬포 쪽 149구 등 약 211구가 수습됐고, 신원을 나눌 수 없던 132구는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에 함께 모셨습니다.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 기록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420~425·495~496·501·523~525쪽 ·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결정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