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경의 진압·희생D · 정부 보고서와 공식 사건일지를 대조한 기록

정방폭포 부근 집단희생

서귀포시 정방폭포 부근

여러 달 동안 집단총살 장소가 된 정방폭포 일대에서, 1949년 1월 22일 여성·어린이·노인 중심의 대규모 희생이 벌어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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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일대에서는 1948년 11월부터 여러 차례 총살이 벌어져 전체 235명의 이름이 확인됐습니다. 그중 1949년 1월 22일에는 동광리·상창리 등에서 붙잡혀 수용소에 있던 주민 80여 명이 끌려와 총살됐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2020년 추가 조사에서 이날 이름이 확인된 희생자는 55명입니다. 한 장소의 한날 숫자와 여러 달 전체 숫자를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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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람들의 말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공식 사건일지와 현장 기록 · 기록과 말을 쉽게 줄인 내용
동광리 주민들은 불탄 마을을 떠나 굴과 한라산 쪽으로 피신했다가 눈 위 발자국 때문에 붙잡혔고, 중문을 거쳐 서귀포 수용소에 갇힌 뒤 정방폭포로 끌려갔다고 전합니다.
정방폭포 부근 집단희생 기록출처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7~220쪽 · 공식 사건일지 194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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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보다 깊이 보기

정방폭포의 55명·80여 명·235명은 각각 무엇인가요?

여러 달 전체, 1월 22일 증언, 신고 명단을 한 숫자로 섞지 않고 이동 경로와 수용 과정까지 봅니다.

장소의 성격나누어 판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총살터

정방폭포·소남머리·자구리해안 등에서는 1948년 11월부터 반복해서 총살이 벌어졌습니다.

추가 조사는 정방폭포 일대 여러 지점과 여러 날짜를 합쳐 235명의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이 수를 1월 22일 하루 피해로 쓰면 틀립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7~218쪽
수용 체계당시 상황

지서에서 농회창고와 군 정보과로

산남 지역에서 붙잡힌 주민들은 관할 지서를 거쳐 서귀포의 농회창고 등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은 제2연대 1대대 정보과가 취조실과 유치장으로 썼습니다. 고문과 조사 뒤 많은 사람이 즉결처형 대상으로 분류됐다고 보고서는 적습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7쪽
붙잡힌 경로기록으로 확인

마을 화재→굴 피신→눈길 추적

동광리 주민들은 마을이 불탄 뒤 큰넓궤와 한라산 쪽으로 피신했다가 눈 위 발자국 때문에 붙잡혔습니다.

이들은 중문리와 서귀포 수용소를 거쳐 1월 22일 감산·광평·상창리 주민 등과 함께 정방폭포로 끌려갔습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8쪽
1월 22일확인 범위 주의

증언 80여 명, 확인 명단 55명

유족과 주민은 80여 명 이상으로 전하지만 신고 자료에서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55명입니다.

이날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많이 포함된 공개 총살로 기억됩니다. 55명은 현재 확인된 이름의 수이지 증언을 거짓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8~220쪽 · 공식 사건일지
시신 수습기록으로 확인

오랫동안 가족이 찾지 못함

군경은 바로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고, 많은 유족은 가족의 유해를 찾지 못했습니다.

몇 달 또는 1년 뒤 찾아갔을 때는 신원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동광리에는 시신 없이 만든 무덤도 남았습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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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나요?

어디에 적혀 있나요?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7~220쪽(일대 전체 235명·1월 22일 확인 55명) · 공식 사건일지 1949.01.22(80여 명)
누구의 어떤 책임인가요?
혐의와 전투 참여를 재판으로 가리지 않고 수용 주민을 끌고 가 죽인 책임은 제2연대와 서귀포 지역 수용·취조 체계를 운영한 군경 지휘 쪽에 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1월 22일 증언의 ‘80여 명’과 신고 확인 55명은 조사 방법이 다릅니다. 정방폭포·소남머리·자구리해안 등 정확한 개인별 희생 지점도 모두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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