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전D · 정부 보고서와 공식 사건일지를 대조한 기록

김용철 고문 사망

제주시 조천읍 옛 조천지서

3·1 사건 피의자로 수배되던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경찰에 붙잡힌 지 이틀 만에 고문으로 숨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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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김용철은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1947년 3·1 사건에 관계한 혐의로 수배했고, 1948년 3월 4일 대흘리에서 숨어 지내던 그를 붙잡았습니다. 이틀 뒤 조천지서에서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검에서 매를 맞아 생긴 뇌출혈이 사망 원인으로 확인됐고, 당시 군정재판은 조천지서 경찰관 5명 모두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02

기록과 사람들의 말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부검 의사·현장 목격자·군정재판 기록 · 기록과 말을 쉽게 줄인 내용
첫 부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미군 고문관이 다시 부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장시영 의사는 몸 밖에서 가해진 충격으로 생긴 뇌출혈이 결정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목격자는 경찰이 김용철을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두 차례 부검과 경찰관 5명의 유죄판결출처 · 진상조사보고서 149~152쪽 · 제주신보 1948년 3월 12일 · 조선일보 1948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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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보다 깊이 보기

김용철은 누구였고, 왜 붙잡혔나요?

‘학생이 고문으로 숨졌다’는 한 문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김용철의 신분, 경찰이 의심한 이유, 남로당 관계가 확인된 범위, 사망 원인을 밝혀낸 과정을 차례로 봅니다.

누구였나기록으로 확인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추가 조사보고서에는 1927년생 김용철로 적혀 있습니다.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나이를 21세 또는 신문 보도를 옮겨 22세라고 적습니다. 옛날에는 세는나이와 만 나이가 함께 쓰였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보입니다. 학생이었다는 사실과 조천리에서 살았다는 점은 여러 기록이 같습니다.

자료 ·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49~150쪽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교육계 피해 명단
왜 붙잡혔나당시 상황

3·1 사건 피의자로 수배 중

경찰은 김용철을 1947년 3·1 사건에 관계한 혐의로 찾고 있었습니다.

1948년 3월 4일 새벽, 김용철은 대흘리 2구에서 숨어 지내다 붙잡혔습니다. 여기서 ‘피의자’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아 조사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죄가 확정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료 · 제주신보 1948년 3월 12일 · 진상조사보고서 149~150쪽
남로당 관계확인 범위 주의

개인 가입은 아직 확인되지 않음

현재 확인한 정부 보고서에는 김용철 개인의 남로당 가입을 증명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조천중학원 안에 민애청 같은 조직과 남로당에 이어진 작은 조직이 있었고, 일부 학생이 전단을 뿌리거나 시위에 참여한 사실은 추가 조사보고서에 나옵니다. 그러나 학교에 그런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과 김용철이 그 조직원이었다는 주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당원 명부나 판결문이 나오기 전에는 ‘가입 확인 안 됨’으로 적습니다.

자료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534~535, 604~605쪽 · 진상조사보고서 149~152쪽
사망 확인기록으로 확인

재부검·목격·재판이 서로 맞음

두 번째 부검은 외부 충격에 따른 뇌출혈을 사망 원인으로 확인했습니다.

시신에는 온몸에 검은 멍이 있었습니다. 첫 부검이 경찰의 방해로 제대로 되지 않자 미군 고문관이 재부검을 지시했습니다. 부검 결과, 목격자의 말, 군정재판 판결이 고문 사망이라는 결론을 서로 뒷받침합니다. 1948년 5월 조천지서 경찰관 5명은 모두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자료 · 진상조사보고서 150~152쪽 · 조선일보 1948년 5월 9일
판단 기준나누어 판단

조사 이유와 고문 책임은 따로 봄

남로당원이었다 해도, 그것은 조사의 이유가 될 수 있을 뿐 고문 사망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기준은 오늘의 잣대만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건 당시 미군정이 관련 경찰관들을 체포해 재판에 넘겼고 모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정치 활동이나 범죄 혐의는 증거와 재판으로 가려야 하며, 조사 중 사람을 때려 죽인 책임은 별도로 물어야 합니다.

자료 ·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제4차 회의록 1948년 4월 17일 · 군정재판 보도
04

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나요?

어디에 적혀 있나요?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149~152쪽 ·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 1948년 3월 6일
누구의 어떤 책임인가요?
김용철에게 혐의가 있었다면 경찰은 법에 따라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혐의가 있다는 것과 고문해 죽여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당시 미군정도 경찰관 5명을 재판에 넘겨 모두 처벌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살펴본 정부 보고서에는 김용철이 남로당원이었다는 당원 명부나 판결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조천중학원 안에 남로당과 이어진 학생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김용철 개인의 가입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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