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전에는 무엇을 했나요?
-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는 1925년에 태어났다고 적혀 있습니다. 대정중학원 교사였고 남로당 대정면 조직을 맡았습니다.
- 1947년 3·10 총파업 때 대정면에서도 함께 파업하자는 의견을 제주도당에 전했습니다. 뒤에는 제주도당에서 조직을 맡는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 ‘김달삼’은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진짜 이름은 이승진입니다. 보고서는 장인 강문석이 일제강점기에 썼던 이름을 이승진에게 권했다고 적었습니다.
4·3 때 어떤 일을 맡았나요?
무장공격을 하자고 제안
이삼룡의 말에 따르면 김달삼은 1948년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 신촌에서 열린 회의에서 무장공격을 하자고 말했습니다. 공격하기로 정해지자 자신이 군사 책임자를 맡겠다며 공격 날짜를 알렸습니다.
군사조직 전체를 지휘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사부와 군사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김달삼은 군사위원장과 전체 사령관을 함께 맡았습니다. 유격대·자위대·특경대를 만들고 사람·먹을 것·무기·선전 준비를 전체적으로 지휘했습니다.
4월 28일 대화에서 무장대를 대표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을 만나 싸움을 멈추고 무기를 차례로 내려놓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김달삼은 무장대를 대표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나왔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제주를 떠나 북한 쪽 대회에 참석
정부 보고서는 김달삼이 8월 2일 무렵 제주를 떠난 것으로 봅니다. 그는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회의를 이끄는 사람 중 한 명이 됐습니다. 25일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원이 됐습니다.
북한 정부를 지지하는 연설
해주대회에서 박헌영을 지지했습니다. 5·10선거를 방해한 일을 자신들의 성과라고 말했고 소련군과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정부 보고서는 이 선택이 제주에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한 한 가지 원인이 됐다고 봅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유격대를 이끌다 사망
정부 보고서에는 3월 20일 이형근 준장이 북한에서 유격대를 이끌고 내려온 김달삼에게 싸움을 멈추고 돌아오라는 글을 보냈다고 나옵니다. 당시 신문은 3월 22일 정선군 지경리에서 사진과 가지고 있던 물건, 붙잡힌 사람의 말을 비교해 시신이 김달삼이라고 확인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어디까지 사실로 확인됐나요?
태어난 해와 학교를 다닌 기록, 정확히 숨진 날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 페이지는 정부 보고서의 ‘1925년생’ 기록을 따랐습니다. 3월 20일은 싸움과 돌아오라는 권고가 확인되는 날, 3월 22일은 시신을 찾아 김달삼이라고 확인했다는 보도가 나온 날로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