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전에는 무엇을 했나요?
- 추가 조사보고서에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를 가르친 교사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 1948년 1월 신촌리에서 경찰이 사람들을 잡아갈 때 붙잡혀 약 42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허춘섭은 고문 때문에 귀와 발가락을 다쳤다고 말했습니다.
- 이삼룡은 무장공격을 이야기한 신촌의 19명 회의에 이덕구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이덕구를 처음 공격을 정한 사람으로 표시하지 않습니다.
4·3 때 어떤 일을 맡았나요?
제1연대·3·1지대 지휘
정부 보고서가 가져와 적은 남로당 쪽 자료에는 이덕구가 조천·제주·구좌 지역을 맡은 제1연대, 곧 3·1지대의 지휘자로 나옵니다.
김달삼 뒤 전체 지휘를 맡음
김달삼이 1948년 8월 제주를 떠난 뒤 이덕구가 무장대 전체 지휘자가 됐습니다. 10월 24일에는 이덕구 이름으로 정부에 싸움을 선포하는 글과 군경에게 보내는 글이 나왔습니다.
무장대가 약해진 뒤에도 지휘
1949년 봄 무장대 조직이 거의 무너진 뒤에도 전체 지휘자로 남았습니다. 정부 보고서는 김달삼 다음으로 무장대를 대표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경찰과 싸우다 총에 맞아 사망
화북지서 경찰부대가 작은가오리 근처에서 무장대와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덕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당시 국방부는 다르게 발표했지만, 정부 보고서는 경찰이 벌인 작전이었다고 확인했습니다.
시신을 사람들 앞에 보인 뒤 불태움
경찰은 시신을 나무 십자가에 묶어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하루 동안 두었습니다. 그 뒤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외조카 강실의 말도 정부 보고서에 나옵니다.
어디까지 사실로 확인됐나요?
처음 지역부대를 지휘했다는 내용은 정부 보고서가 가져온 남로당 쪽 자료에 나옵니다. 김달삼 뒤 전체 지휘자가 된 일과 1949년 6월 7일 숨진 일은 정부 보고서, 당시 보도, 가족의 말이 서로 뒷받침합니다. 처음 무장공격을 정한 사람 명단에는 넣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