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전에는 무엇을 했나요?
- 1947년 3월 5일 만들어진 ‘제주도 3·1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 추가 조사보고서에는 1946년 6월부터 1947년 1월까지 하귀국민학교 교장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4·3 때 어떤 일을 맡았나요?
3·1 사건 뒤 대책 조직을 이끎
3·1 사건 때 경찰이 총을 쏜 뒤 남로당 제주 조직의 대책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총을 쏜 사람을 벌하고 경찰에 잡힌 사람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남로당의 주장과 소식을 알리는 일
1948년 6월 20일 미군이 만든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에는 제주도당의 선전부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선전부장은 조직의 주장과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임자입니다.
어느 시기에는 제주도당 책임자
정부 보고서가 가져온 남로당 쪽 간부 명단에도 제주도당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정부 보고서는 이 명단이 서로 다른 때의 책임자들을 한꺼번에 적은 것으로 봅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진압 작전 중 총에 맞아 숨졌다는 발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김용관을 총으로 쏴 죽였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를 ‘남로당 당수’, 곧 가장 높은 책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군이 발표할 때 쓴 말입니다. 정확히 언제 어떤 자리를 맡았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사실로 확인됐나요?
1947년 대책 조직 대표, 1948년 선전부장, 어느 시기의 제주도당 책임자라는 기록은 서로 다른 때의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맡았다고 적지 않았습니다. 총에 맞아 숨졌다는 발표 뒤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와 가족 이야기는 첨부 보고서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