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1947년 3월 1일 기념식은 허가됐지만 거리 행진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행진 대열이 관덕정을 지난 뒤, 말을 탄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치자 일부 주민이 돌을 던지며 뒤따랐습니다. 경찰은 경찰서 공격으로 잘못 판단해 총을 쐈고 주민 6명이 숨졌습니다. 도립병원 앞에서는 다른 경찰의 난사로 2명이 더 크게 다쳐 공식 일지는 전체 부상을 8명으로 정리합니다.
기록과 사람들의 말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말을 탄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친 뒤 군중이 술렁였고, 경찰의 총격으로 길을 지나던 사람까지 희생됐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출처 · 진상조사보고서 102~113쪽 · 공식 사건일지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는 왜 총격이 일어났나요?
기념식의 허가 여부, 거리 행진, 어린이 사고, 경찰의 판단, 피해자의 위치를 차례로 봅니다.
기념식은 허가, 거리 행진은 미허가
북국민학교의 기념식은 경찰 허가를 받았지만, 행사 뒤 거리 행진은 군정의 반대 속에 진행됐습니다.1947년 10월 법원 판결도 기념식 자체는 허가됐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행사가 불법이었다’거나 ‘모든 행동이 허가됐다’고 한쪽으로 단순화하면 안 됩니다.
말에 어린이가 다치고 군중이 뒤따름
행진이 지난 뒤 남아 있던 100~200명 가운데 일부가 말을 탄 경찰을 야유하고 돌을 던지며 쫓았습니다.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했습니다. 뒤의 미군 보고도 처음 보고를 고쳐 ‘200명 미만이 기마경찰을 뒤따랐다’고 적었습니다.
주민 6명 사망
15살 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21살 여성 등 6명이 숨졌습니다.대부분 경찰서에서 떨어진 길이나 골목에서 쓰러졌고, 검안 결과 1명을 빼고는 등에 총을 맞았습니다. 위협 사격만으로 흩어질 수 있었는지 따져야 할 정황입니다.
도립병원 앞 경찰 난사
부상자가 실려 오자 겁을 먹은 응원경찰 한 명이 총을 난사해 행인 2명이 크게 다쳤습니다.미군 정보보고도 이 행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발포로 평가했습니다. 관덕정 총격과 병원 앞 총격은 같은 날 이어졌지만 발포자는 달랐습니다.
중요한 기점이지만 모든 원인은 아님
이 발포는 큰 항의와 파업을 불렀지만, 4·3 무장공격은 1년 뒤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의 별도 결정과 준비로 시작됐습니다.경찰 발포의 책임과 남로당 무장공격의 책임을 인과관계 하나로 뭉개지 않습니다. 앞선 잘못이 뒤의 조직적 폭력을 자동으로 정당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나요?
- 어디에 적혀 있나요?
-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102~113쪽 ·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 1947년 3월 1일
- 누구의 어떤 책임인가요?
- 사람들에게 총을 쏜 책임은 발포한 경찰과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한 지휘 쪽에 있습니다. 뒤에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공격을 준비하고 시작한 책임은 이 사건과 따로 살펴야 합니다.
-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동 경로와 어느 총탄에 맞았는지는 남은 기록만으로 모두 가려내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