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청에서 시작한 파업은 학교·우체국·운수회사·은행·면사무소로 퍼졌습니다. 경찰 기록은 166개 기관과 단체, 4만 1,211명이 참여했다고 적었습니다. 공무원·교사·학생과 일부 경찰까지 참여한 넓은 항의였지만, 남로당 제주도당이 3월 7일 지령을 내려 조직적으로 이끈 사실도 확인됩니다.
기록과 사람들의 말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제주도청에서 시작한 파업이 사흘 사이 제주 전역의 거의 모든 직장으로 퍼졌다고 적혀 있습니다.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출처 · 진상조사보고서 114~123쪽 · 공식 사건일지 1947년 3월 10일
3·10 총파업은 누가 참여하고 누가 조직했나요?
많은 주민의 항의였다는 사실과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 지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제주도청 직원부터 업무 중단
도청 직원들은 발포 책임자 처벌, 부상자 지원, 무장과 고문 중단 등을 요구했습니다.3월 10일 도청 약 140명이 업무를 멈췄고, 같은 날 학교·운수업체·항무서 등도 참여했습니다. 이튿날부터 다른 관공서와 회사로 넓어졌습니다.
166개 기관·4만 1,211명
경찰사 기록은 경찰·사법기관을 뺀 166개 기관과 단체가 참여했다고 적었습니다.학교 학생까지 포함된 숫자입니다. 상점과 일부 경찰의 동참은 이 집계에서 빠져 있어, 실제 참여 범위는 더 넓었을 수 있습니다.
3월 7일 지령과 투쟁위원회
남로당 제주도당은 각 읍·면 조직에 지령을 내리고 3월 10일 정오부터 파업하라고 했습니다.도당은 안팎의 위원회를 만들고 요구안을 배포했습니다. 총파업이 넓은 민심의 항의였다는 사실과, 남로당이 그 흐름을 조직에 이용했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합니다.
참가했다고 모두 남로당원은 아님
우익 인사와 공무원, 교사, 학생, 일부 제주 출신 경찰도 파업에 참여했습니다.발포 책임을 묻는 항의에 동참한 것과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참여 이유와 조직 관계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대규모 검거와 조직의 지하화
군정과 경찰은 파업 지도자를 잡고 응원경찰을 늘렸으며, 남로당 조직은 더 비밀스럽게 움직였습니다.이 과정은 긴장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파업 탄압이 1년 뒤 무장공격을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무장공격은 뒤에 지도부가 토론하고 선택한 결정입니다.
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나요?
- 어디에 적혀 있나요?
-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114~123쪽 · 제주4·3평화재단 주요사건 ‘3·1사건과 민·관 총파업’
- 누구의 어떤 책임인가요?
- 항의 파업에 참여한 일과 폭력을 쓴 일은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남로당의 조직 활동, 경찰의 대규모 검거와 고문도 각각 따로 확인합니다.
-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 166개 기관·단체의 모든 건물 위치를 한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지도 점은 파업이 시작된 곳을 찾기 위한 대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