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1949년 1월 9일 무렵 의귀국민학교에는 산에서 피신하다 붙잡힌 의귀·수망·한남 주민 80여 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군은 1월 10~11일 젊은 주민 20여 명을 먼저 총살했습니다. 12일 새벽 무장대가 수용자를 구하고 부대를 무력화하려 학교를 공격했지만 크게 패했고 군인 4명도 숨졌습니다. 전투 직후 군은 남아 있던 주민 약 60명을 보복으로 총살했습니다. 신고 명단으로 확인된 관련 희생자는 38명이고, 유족 증언은 80여 명입니다.
기록과 사람들의 말에는 어떻게 나오나요?
추가 보고서는 약 80명의 희생이 모두 전투 뒤에 생긴 것은 아니라고 정리합니다. 약 20명은 전투 전 이틀에, 약 60명은 전투 직후 보복으로 희생됐습니다.의귀리 교전·집단희생 기록출처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3~216쪽 · 미군 보고 · 현의합장묘 발굴 기록
의귀국민학교의 약 80명은 모두 전투 뒤에 희생됐나요?
수용, 전투 전 총살, 무장대 공격, 양쪽 전투 피해, 전투 뒤 보복, 발굴 수를 정확히 나눕니다.
산에서 피신하다 붙잡힌 약 80명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은 마을이 불탄 뒤 숨어 지내다 군에 붙잡혀 학교에 갇혔습니다.이들이 모두 무장대원이었던 것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여성과 가족 단위 주민도 있었고 개인별 혐의 재판은 없었습니다.
1월 10~11일 약 20명 먼저 총살
군은 무장대 공격이 있기 전부터 수용 중인 젊은 주민들을 골라 죽였습니다.따라서 약 80명 전체를 ‘1월 12일 공격에 대한 보복 희생’으로만 설명하면 앞선 총살을 놓치게 됩니다.
수용자 구출과 부대 무력화를 노림
1월 12일 새벽 무장대는 학교의 제2연대 2중대를 공격했지만 미리 대비한 군의 화력에 크게 패했습니다.미군 보고는 무장대 피해 51명, 주민 증언은 약 80명으로 전합니다. 동료들이 사상자를 산으로 옮겨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제2연대 군인 4명 전사
학교 전투에서 문석춘·이범팔·안성혁·임찬수 등 군인 4명이 숨졌습니다.남원읍 충혼묘지 비석에도 네 사람의 이름과 전투 경위가 남아 있습니다. 군인 피해도 사건의 실제 일부입니다.
남은 주민 약 60명 보복 총살
군은 전투가 끝난 날 학교에 갇혀 있던 주민을 동쪽 밭으로 끌고 가 죽였습니다.무장대가 부대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수용자 개개인의 전투 참여를 확인하지 않고 보복했습니다. 나중에 유족들은 뒤섞인 유해를 함께 묻었습니다.
증언 약 80명·확인 38명·발굴 39구
세 숫자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얻은 값이라 하나만 정답처럼 쓸 수 없습니다.신고 명단은 38명, 2003년 합장묘 발굴은 39구, 유족과 주민 증언은 80여 명입니다. 이름을 더 찾는 조사가 남아 있습니다.
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나요?
- 어디에 적혀 있나요?
-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213~216쪽(증언 약 80명·신고 확인 38명) · 공식 사건일지 1949.01.12
- 누구의 어떤 책임인가요?
- 부대를 공격해 군인 사망과 전투를 일으킨 책임은 무장대에 있습니다. 전투 참가 여부를 가리지 않고 갇힌 주민을 전후로 총살한 책임은 제2연대 1대대 2중대에 있습니다.
-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 유족 증언은 약 80명, 신고로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38명입니다. 발굴 유해도 39구여서 희생자 전체 신원을 확정하려면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